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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경 평양 서문 밖 대찰리 부근에는 당시 유난히도 깨끗한 서양식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병원이나

제생원 맹아부 시대

 1909년경 평양 서문 밖 대찰리 부근에는 당시 유난히도 깨끗한 서양식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병원이나. 이 때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Rosetta S. Hall여사가 신혼여행 시 중국 체후(芝果)에 체류 중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농아학교를 시찰하고 농교육에 관심을 두면서 귀국 후 이익민씨를 파견, 1909년 최초로 맹양 맹아학교 농아부를 부설함으로 농교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수화는 자연히 중국식 수화를 도입, 농교육을 시도하 였다. 1909년이라 하면 일본의 침략이 극도에 달하여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던 전해인 만큼 우리 배달 민족으로서는 일찍이 볼 수 없는 암담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때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일개의 미국 선교사가 맹아 학교를 세워 앞 못보는 맹인들에게 점자를 쓰고 읽게 하였고 듣지 못 하는 농아인에게 수화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특별히 지도하여 비교적 진보적인 방법으로 농교육을 시작, 사회의 이목을 끈바 있었다. 이에 아연 놀란 것은 총독부 당국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네의 체면 유지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본교 교육 발전의 시초는 1913년 4원 1일, 조선 총독부가 맹·농아인들의 구호와 교육을 목적으로 서을 서대문구 천연동 98번지에 제생원 맹아부(濟生院 盲啞部)를 설치,당시 맹생 급비생(盲生 給費生) 15명과 자비생(自費生) 10명 계 25명, 농아생 급비생 8명, 자비생 3명 계 11명 총 36명 이 처음으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동년 4월 11일 조선총독부령 제41호로 제생원 규칙 전문 29조가 공포되어 초등교육 겸 직업교육 실시를 목적으로 하고 수업 연한을 맹과는 3년, 아과는 5년을 두었다. 당시 본 제생원 원장이 해방 직전까지 조선 총독부 내무국장직을 겸임하여 일견 장애아 교육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여겨 있지만 해방 전 농아교육이 인간교육을 도외시키는 기술 교육에만 편중된 식민지 교육이었다. 단군 자손의 민족적 주체의식을 불어 넣어 주는 민족 혼의 교육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으로 하여금 자립 능력의 함양과 경제 생활에 자신을 갖게 띠었다. 제생인 창설 당시 청각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심하여 청각장애아의 부모들은 그늘의 자녀들을 이웃에 내놓지 않음은 물론 자기 가문에 장애아가 있음을 수치로 생각한 나머지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외부에 나타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충독부는 각 면에 지시하여 청각장애아들을 색출, 기숙사에 입사시키고 국비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교육을 하는 형편이었다. 이건 가운데 1918년 3원 24일 일본인 3명을 포함한 이윤학, 한필남, 조봉서, 황삼손 등 6명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농아학교 초등부 졸업생이 되었다.
 1931년 4월 19일 서대문 천연동에 있던 제생윈을 현재 본교가 있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번지로 이전하였는데 이전지인 신교동 1번지는 칠궁(七宮)의 하나로 이조 영조(1724∼ 76 재위)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신주를 봉안, 제사하었던 왕실 묘이다. 영조 40닌(1764년)영빈 이씨가 사망하고 다음 해 시호를 의열이라 추증하고 묘의 이름을 의열묘라 부르다가 정조 20년(1778넌)에 선희궁이라고 고쳤다는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다. 교육 방법은 세계 어느 농아학교의 교육방법과 마찬가지로 초기에 수화교육을 지향하다가 구화 중심 교육으로 전환하고 일본식 농교육을 도입.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받게 하였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大塚米藏(1913. 4. 1∼1923. 2. 10)씨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래 제5대 田中勝次郞(1936. 6. 4∼1945. 8. 15)교장에 이르기까지 32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농아교육에 의해 본교가 운영되었으며 특기할 일은 맹인 한글 점자 창안사 박두성 선생(1931.12.12~1932. 1. 8)과 엄창섭(1936. 3. 6∼1936. 6. 3)선생이 3대와 4대에 일시 적으로 교장 대리로 취임하여 한국인의 위신을 세워 주었을 뿐이다.
 1937넌 4월 12일 2학급에서 3학급으로 학급수가 증설됨에 따라 선희궁안의 왕실 한옥을 거의 철거 그 자리에 현대식 규모의 본관 교사를 신축 교실수도 16개실로(276평) 늘렸으며 기숙사(78평)와 부속건물 및 관사(官舍)등 13동 (104평)을 착공하였다. 그리고 동년 7월 13일엔 삼중고(三重苦)의 성녀(聖女) 헬렌켈러 여사의 학교 방문시 청각장애인들에게 상당한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원문 출처] (김기범,“본교 80년 회고록”,서울선희학교 동창회, 선희지, pp. 232- pp.235, 1993)